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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일기/단상

봄날은 간다

by 헤일매리 201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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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릉에서 서울까지, 해가 진 뒤 그 먼 길을 혼자 달려왔을 상우의 마음에 울컥.


2.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고 묻지만 실제로 사랑은 변했다. 영화 속 상우와 할머니 둘 만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맴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찾아왔을 때 할머니는 버스와 여자는 지나면 잡는게 아니라고 다독이며 상우를 위로하고 그렇게 상우의 봄날이 간다.


3. 아웃포커싱을 잡았지만 이영애의 얼굴 표정은 선명하게 보인다. 벚꽃내린 봄날, 마지막으로 둘이 만났을 때의 장면이 내게는 참 알 수 없는 씬같아 보였는데, 그렇게 며칠 전까지 생각했는데 최근 J와 연락이 닿아 이야기하다 보니 자신을 잃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자신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차이를 말씀한 kom1029님의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4.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저렇게 웃는 유지태의 표정이 참 묘하고 아득해보인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읽었던 씨네21에 올라온 님의 kom1029 글을 인용한다. 

http://www.cine21.com/review/nz/view/article_no/68977








...(생략) 

똑같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한들, 자기를 잃으며 나아가는 것과 자기를 죽이며 나아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대체로 전자를 도태라고 부르고, 후자를 진보라 말한다. 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다.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병구는 분명히 안다. 쇠파이프 쥔 손을 움직이고 엄마의 입 안에 유독물질을 흘려넣은 손이 누구의 것인지를. 그러나 병구는 외면했다. 엄마를 죽이고 애인을 죽인 남자는 회사 사장이 아니라 외계인이다. 내가 해야하는 일은 회사 사장에게 맞서는 일이 아니라 외계인을 죽이는 것이라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만든 환상에 묻혀 살기를 원하는 병구는, 그렇기 때문에 애초부터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상우는 죽지 않기 위해 연인과의 모든 과거와 환상 속의 자신을 죽였다.


은희경의 소설집 말미에 수록된 한 문학평론가의 감상평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글에 의하면 사랑은 순정과 연기, 오버액션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모든 소년은 사랑의 전략으로 순정을 구사하지만,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연애사들을 살펴보았을 때 사랑의 성패는 대개 순정이 아니라 연기력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소년의 사랑은 대부분 실패하고 폐기된다. 거듭되는 순정의 실패 속에서 소년은 연기로 전략을 수정하며 또다른 사랑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봄날은 간다>는 사랑이 연기가 되기 직전, 바로 그 순정의 실패에 관한 영화다. 결과적으로 <500일의 썸머>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영화가 되었는데, 똑같이 사랑의 실패를 이야기하지만 다른 사랑의 시작을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실패한 소년이 열병을 앓듯 분열증에 시달리다 치유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봄날은 간다>가 아픈 이유는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그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아프게 겪는 이 모든 경험이, 실은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고 나만 겪는 모노드라마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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