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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오늘의 흰죽과 장염과 정성

by 헤일매리 202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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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원인 모를 위장염에 2주간 시달리고 있다. 예상보다 길어진 불편함에 범인색출은 길을 잃었다. 과연 범인은 누구였을까? 멸치칼국수? 스프커리? 이제는 알 도리가 없다. 음식 먹기를 조심하며 지낸지 열흘쯤 됐을까. 의사선생님께서 이제 식사도 천천히 하되 치맥같은 건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내는 석방된 포로처럼 들뜬, 그러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바게트 샌드위치를 영접했다. 하지만 아내는 결국 흰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장염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위장염이라 했으나, 나는 그것이 위염이라는 건지 장염이라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아내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두가지 증상이 다 있는거야" 아하! 

건강검진으로 내시경을 주기적으로 받는 직장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 위염이 있다고? 그것도 매년? 하지만 이내 납득이 갈 수 밖에 없다. 매일 앉아있지, 스트레스 받지, 그래서 막 먹지, 그러고나서 또 앉아있지. 내겐 늘 체감하지 못할 만큼의 약간의 위염이 있었고 검진표에는 '만성표재성 위염' 이라 적혀 있었다. 간혹 체감할 만큼 아플때는 약국에서 위염 약을 2~3주씩 먹곤 했다.

장염에 걸렸다, 는 말은 그 말을 듣는 누구에게든지 본인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혹자는 장염의 고통을 물총이라고 표현했다. (끄덕)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얼굴로 위로를 건내며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장염 걸렸을 때는 포카리 같은 이온음료랑 흰죽만 먹어야지"

 

아내도 가끔 내가 배탈이 나거나 아플때, 흰죽을 쑤어서 나와 같이 먹었다. 당신은 아프지 않는대도 대개 나와 같이 죽을 먹어줬다. 못 먹는 것도 힘든데 다른 음식 냄새 맡으면 더 힘들까봐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에는 아내가 영 힘들어 보였다. 상태가 호전되기는 커녕, 더 악화되자 제일 먼저 포카리스웨트부터 4병 사왔다. 

아내는 마른 입으로 입만 적실 뿐, 계속 불편해보였다. 서있기 힘들어 했고 앉아있기도 힘들어했다. 누워있어도 몸살기운에 머리와 허리까지 아파했다. 저녁에는 그래도 죽을 먹어야 할텐데, 아내는 스스로 죽을 쑬 힘도 없어보였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나는 죽을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했다. 

누워서 해쓱한 표정으로 아내가 말했다. "쌀 한컵정도만 불리고요. 그 다음에 들기름 한 스푼만 냄비에 두르고 불린 쌀이랑 볶다가 물 여섯컵 넣고 팍 끓으면 그때부터 약불로 계속 끓이면 돼."

그 간단한 말처럼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흰죽을 만들어 아내에게 줬다. 이런 흰죽에 퀄리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아내가 해주던 그 흰죽과 별반 다른게 없어보였다. 별 것 없는 요리법에 큰 차이가 있을리 만무했다. 


흰죽 끓이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방에서 요리를 위해 이렇게 오래 서있던 적이 없었다. 나는 타이머를 20분 맞추고 알람이 울릴 때까지 계속 죽을 저었다. '아내도 가끔 내게 죽을 만들어 줄 때 이 긴 시간동안 흰쌀이 눌러붙지 않게 가끔씩 저어줬겠구나.' 아내의 정성은 그 죽을 위해 주방에 서있던 시간만큼이나 길고 길었다. 그것이 죽이었든 뭐였든, 그것을 먹고 만족해하고 흡족해 할 나의 얼굴을 상상하며 정성을 쏟아부었겠구나.

 

흰죽은 내게 아내의 정성을 느끼게 하는 서프라이즈 선물같았다. 빨리 나아,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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